사진으로 보는 실크로드 불교문화 탐방(4)
조보연(중앙의대 중앙대병원 내분비내과)
돈황 막고굴 1
실크로드 불교문화 탐방의 정점은 돈황 막고굴이다. 막고굴을 참배하려면 먼저 실크로드-막고굴 영화를 약 30분 관람하고 셔틀 버스로 이동해서 중국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한 팀에게 8개의 석굴만 관람이 허락되고, 석굴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8개 굴 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8개 굴에 불과하지만 돈황 막고굴의 불상과 불화, 그 것도 1000여년에 걸쳐 변화된 모습을 직접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석굴 안 사진은 중국 敦煌硏究院에서 출간한 책(DUNHUANG A pearl on the silk road, a treasure trove of Buddhist culture)을 스캔한 사진으로 대신한다.
막고굴은 돈황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735 개의 동굴이 벌집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사진 1).
전체 석굴은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 구역은 막고굴의 중심이다. 과거 승려들이 종교 활동을 행하던 장소로서 487개의 동굴이 있고(사진 2), 동굴 마다 벽화 또는 불상이 있다(사진 3). 북쪽 구역에는 248개의 동굴이 있는데 이 중 단 5개만 벽화나 불상을 갖추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승려들이 수행, 거주, 그리고 죽은 뒤 매장되던 장소이다. 막고굴 전체로 따져보면 총 492개의 동굴에 벽화와 불상이 있다. 그 안에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 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벽화의 총 연장 길이는 45km이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66년이다. 승려 낙준(樂僔)이 사방을 주유하다가 삼위산(三危山)에 이르러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석양에 바라본 삼위산이 금빛으로 찬란하데 금빛 암벽에 천여 개의 부처가 떠 있는 것과 같았다. 낙준은 그곳이 성지라 믿고 동굴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한 것이 막고굴의 시작이었다. 그 후 법량선사(法良禪師) 등이 계속 동굴을 파고 수련하게 되면서 이 곳은 막고굴(漠高窟), 즉 '사막(沙漠)의 높은[高] 곳의 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량(北凉)의 것으로(사진 3)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수(隋), 당(唐)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막고굴은 북송(北宋)시대를 거쳐 돈황 일대가 서하(西夏)의 지배 들어가면서 점점 쇠퇴하다가 원나라 제국의 멸망으로 실크로드 무역이 크게 쇠퇴하면서 돈황도 이와 더불어 같이 쇠락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크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1900년, 이른바 '돈황 문서'가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돈황 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정작 막고굴 자체의 보존, 보호 노력은 별로 없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손상을 입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막고굴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보호 지시로 이미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던 덕분에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막고굴의 석굴은 입구가 모두 동쪽을 향해 열려 있다. 입구가 있는 벽면이 동벽, 입구를 들어가서 마주 보는 벽면이 서벽, 왼쪽이 남벽 오른쪽이 북벽이다. 정면이 서방정토가 있는 방향인 서벽에 감실을 만들어 본존불을 안치하고 있다. 각 벽에는 벽화와 감실 안에 불상이 있다(사진 4).
막고굴의 구조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으나 크게 탑묘굴(塔廟窟, Chaitya)과 승원굴(僧院窟, Vihara)로 나누어진다. 탑묘굴은 중앙에 탑 같은 큰 네모기둥이 있고, 그 기둥의 사방에 불상을 안치할 감실(龕室)이 있는 석굴이다(사진 4). 승원굴은 중앙에 기둥 대신 넓은 공간이 있고 네 벽에 작은 감실이 있는 구조이다. 작은 감실은 승려가 거주하기도 하고 좌선하기도 하는 곳이다(사진 5).
막고굴의 북쪽 끝에 있는 3층 누각 전실 1층에는 ‘돈황문서’가 발견된 제16~17굴이 있다. 당나라 말에 만든 제16굴은 사각형의 전실과 주실로 구성되어 있다. 주실의 중앙에는 높이가 3m나 되는 거대한 소조상이 봉안되어 있고 벽면과 천장이 온통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전실에서 복도로 들어서자 오른쪽에 벽면에 사각형문이 보인다. 여기에 ‘017’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는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이 나온다(사진 6 왼쪽 사진). 이 석굴 속에서 약 5만여 권의 경사가 발견되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학문인 ‘돈황학’이 탄생하였다.
제16굴의 입구 전실 북벽에 높이 184cm, 넓이 92cm 의 직사각형 문이 하나 뚫려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작은 굴이 제 17굴이며, 1900년 왕원록이 돈황문서를 발견한 유명한 장경동이다. 이 굴은 깊이 2.5m, 폭 2.7m, 높이 3m 의 작은 복두형 천장의 방굴이다. 석굴 안에 깨끗하고 말쑥한 차림의 가사를 입고 좌선하고 있는 그의 소상이 있다. 그 뒷벽에는 오동나무 밑에서 공양하는 사람을 그린 ‘수하공양자도(樹下供養子圖)’가 있다(사진 6 오른쪽 사진).
장경동이 발견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다. 1900년 도사 왕원록(王圓錄, 1849~1931)이 하루는 굴을 보수하려고 싸여있던 모래를 치우자 제16굴 벽면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한다. 버러진 틈으로 막대기를 넣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벽을 헐어 흙으로 봉해진 작은 문을 발견하게 된다. 문 안에는 석실이 있는데, 그 안에 불서와 기타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석굴에서 발견된 많은 문서들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 가져갔다. 현재 돈황문서는 중국에 2만 6,570점, 러시아에 1만 9,000점, 영국에 1만 3,300점, 프랑스에 6,000점, 일본에 728점, 그리고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48점이 한국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 P.)가 가져간 돈황문서 중에는 신라 혜초(慧超)스님의 ≪往五天竺國傳≫이 포함되어 있다(사진 7).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Copyright(c) Korean Endocrine Societ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