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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이야기 시즌2
아돌프 히틀러는 맥주를 좋아했는가?

윤석기

윤석기 천안엔도내과의원

히틀러는 1889년 독일과 맞닿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세관원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다 국경감시 세관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아버지의 안정적인 직업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폭군에다 술고래인 아버지로부터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얻어맞곤 했다. 성격이 괴팍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했던 히틀러의 아버지는 이웃들로부터 늘 손가락질을 받았고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히틀러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히틀러는 미술에 재능을 보여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고 화가가 되기를 열망하였으나 세 번이나 미술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면서 좌절감에 빠지고 노숙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실패와 빈곤이 사회적인 혼란 때문이고, 그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며 그들에게 적개심을 갖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의 열병을 앓던 히틀러는 군대에 입대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전투 도중 상처를 입어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중사로 제대하게 된다. 조국이 반겨줄 것으로 기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학력도 자격증도 없던 히틀러가 맞닥뜨린 것은 제대군인에 대한 냉대였다. 그 당시 독일은 전쟁에 대한 대가로 영토의 13%를 빼앗기고, 3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기에 이때부터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된다. 사회는 분열되고 희망이 없었던 이런 혼란 속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DAP)’이라는 우익 정당에 입당했고, 그 안에서 숨겨져 있던 그의 선동가적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첫 무대가 된 곳이 1919년 9월 뮌헨 사람들이 자주 찾는 맥줏집 '호프브로이하우스(Hofbaeuhaus)'였다. 히틀러는 첫 연설부터 배우처럼 능수능란한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하고, 때로는 호탕하게 웃는 극적인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히틀러 연설의 특징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짧은 문장과 저속한 표현이었다. 히틀러는 청중을 하나로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그는 연설 때마다 "당신이 바로 나이며, 내가 곧 당신이다. 당신이 독일이며, 우리가 바로 독일이다"라고 강조했다. 패전 독일을 이끌어갈 민족의 지도자(Fuehler)가 히틀러 자신임을 확신시키면서 독일 민족은 위대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청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자 히틀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퇴역군인뿐 아니라 소상공인과 학생, 심지어 보수적인 기업가까지도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히틀러는 맥주를 좋아하지도,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든 집회와 행사를 꼭 맥줏집에서 열었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책가방은 도서관에 두고 다녀야 마음이 놓이는 학생처럼. 1919년 말 독일노동자당의 본부를 맥줏집 지하실에 차린 것을 비롯해 이후 대부분의 집회를 맥줏집에서 개최하였다. 히틀러는 왜 맥줏집을 고집했을까? 독일인에게 맥줏집은 단순히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교류하는 곳이었고, 패전으로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격려하고 원기를 회복하는 신성한 교회 같은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에 '스탐티쉬(Stammtisch)'라는 단어가 있다. 독일의 작은 식당이나 맥줏집에 가면 단골손님이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퇴근 후나 휴일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스탐티쉬는 바로 지역사회의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적인 토론을 하는 곳이다. 이때 맥주를 마시면서 정치적인 현안을 토론하고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는 곳이 바로 맥줏집이었기에 ‘맥줏집 대담'이라고 했고, 히틀러는 이곳을 자신의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

독일인은 바라보면 볼수록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질 때가 많다. 차갑고 냉정한 독일인일수록 맥주를 한 잔 마시면 눈가에 힘이 풀리고 미소 짓고, 두 잔 마시면 대화할 수 있고, 석 잔을 마시면 비로소 마음을 통할 수 있다. 영화 「토르」의 배경이 된 게르만족 신화집 「에다 이야기」에 '맥주를 마시고 하는 말은 진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뮌헨의 맥줏집에서는 나이와 성별, 인종, 지위를 뛰어넘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필자도 과거 뮌헨의 맥줏집을 혼자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 잔의 맥주를 마시면서 옆자리의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게 되고 "Prost ! Prost ! Prost !(건배! 건배! 건배!)"를 외치고 바로 친구가 되었다. 뮌헨의 맥줏집은 처음 만나는 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세상의 근심 걱정을 잊고 웃을 수 있는 곳이 된다.

특히, 호프브로이하우스 맥주의 특징은 부드러우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특징이다. HB가 새겨진 왕관 마크를 1879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이후 왕관 마크하면 호프브로이를 연상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왕관은 왕궁 직영 맥주라는 상징도 있지만 맥주잔에 맥주를 70% 따르고 30%는 반드시 왕관처럼 거품을 올려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평상시에는 도수 5.1의 맥주를 판매하지만 옥토페스트 축제 때는 도수 6.3의 맥주를 출시한다.

히틀러는 나치 창당식과 중요한 정치행사, 심지어 뮌헨 폭동을 일으킬 때도 어김없이 호프브로이하우스(Hofbaauhaus)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곳은 민주주의와 독일 공화국에 반대하는 나치의 근거지였다. 나치 독일의 역사를 만든 주연이 히틀러였다면, 조연은 히틀러에 협력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을 1920년 ‘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즉 나치스로 바꿔 출범시키면서 독일 사회를 되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알코올에 대한 결벽증이 있었던 히틀러는 정작 맥주를 한잔 정도만 마셨다고 한다. 게르만의 바른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히틀러가 맥주를 즐겼든 아니든, 독일인들에게 맥줏집과 맥주라는 이미지를 철저히 이용한 건 사실이다. 그만큼 독일인들의 정서와 감정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맥주를 마시는 장소의 분위기와 맥주의 속성을 교묘히 이용하여 본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독일 사회를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의 늪으로 끌고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