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기 천안엔도내과의원
축구를 좋아하는 축덕들은 UEFA 유로 2024 대회가 독일 10개 도시에서 6월 14일부터 7월 14일까지 개최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개최국인 독일은 우승 팀인 스페인에게 8강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2로 패하고 말았다. 맥주 이야기에 왜 갑자기 축구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사실 독일이 8강에서 패하지 않고 결승까지 진출했다면 독일 전역은 엄청난 광란의 맥주 파티가 열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게 된다.
이번 편에서는 맥주 순수령도 무색하게 만든 독일식 밀맥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독일 분데스리가 리그에 속한 FC 바이에른 뮌헨은 전 세계를 호령하는 축구팀이다. 뮌헨은 31개의 분데스리가 리그 우승 트로피, 그리고 6개의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분데스리가가 긴장감이 없다고 깎아내리는 축구 팬도 있다. 바이에른 뮌헨의 독주 체제가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에는 한국의 김민재 선수가 선수단의 일원이 되었으나 아쉽게도 우승과는 먼 성적을 내고 말았다. 원래 '최강' 바이에른 뮌헨의 우승 세리머니에 언제나 함께하는 것은 맥주다. 뮌헨 선수들은 거대한 맥주잔을 두 팔로 번쩍 들어 마시기도 하고, 서로에게 맥주를 통째로 들이붓기도 한다. 이때 이들과 함께하는 맥주는 20년 이상 바이에른 뮌헨의 스폰서를 맡고 있는 맥주 브루어리 사인 '파울라너(Paulaner)'다.
이탈리아 성인 프란체스코 디파올라를 기리는 기사단 수도원이 1634년 처음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파울라너 맥주의 기원이다. 파울라너란 ‘성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 바울 수도회’란 뜻으로 바울 사도의 옆모습을 맥주 상표로 사용한다. 파울라너 양조장에서는 보통 맥주보다 도수가 높은 도펠비어(Dpppelbier)인 파울라너 슈타르크비어를 사순절 기간 동안 생산하는 전통이 있었다,
파울라너 켈러는 정원을 갖춘 고풍스러운 맥줏집 건물 한복판에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는 황동 담금 탱크가 트레이드마크이며, 현재 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되는 독일의 대표적인 맥주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독일식 맥주는 밀맥주 아닐까? 독일식 밀맥주는 흔히 ‘헤페바이젠(Hefe Weizen)’이라고 불린다. 헤페바이젠은 '효모'라는 뜻의 ‘헤페(Hefe)’와 '밀'이라는 뜻의 ‘바이젠(Weizen)’을 합친 단어다. 즉 독일 효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밀맥주라는 뜻이다. '흰 맥주'라는 뜻의 ‘바이스비어(Weissbier)’라고도 부른다('호가든' 등으로 대표되는 벨기에식 밀맥주와는 성향이 많이 다르다). 홉의 존재감은 없다시피 하고, 그 대신 효모가 만들어내는 바나나 향과 정향 등이 코를 사로잡는다. 빵을 먹는 듯 고소한 풍미도 느껴진다. 맛 성분인 효모가 바닥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살짝 흔들어 마셔야 좋은데, 이런 점에서는 '독일의 막걸리'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안주와 함께 마셔도 잘 어울린다는 점 역시 매력이다. 그런데 이 맥주를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가 있다. 바로 '맥주 순수령'이다.
오늘날의 독일인들이 그렇듯, 수백 년 전의 독일인들도 맥주를 사랑했다. 이들의 맥주 소비량은 가공할 수준이었는데, 식량으로 쓰일 재료마저 맥주로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주식인 빵을 만들 때 써야 할 밀과 호밀마저 동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는 1516년, 이른바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을 선포했다. '맥주를 제조할 때는 물과 맥아, 효모, 홉만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시행령이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진 않지만, 여전히 그 흔적은 남아 있다. 2016년 4월 23일에는,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가 독일 잉골슈타트에서 열린 '맥주 순수령' 반포 5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여전히 많은 독일 맥주들은 '맥주 순수령에 따라 양조되었다'는 문구를 자랑스럽게 라벨에 적어 놓고 있다.
물론 밀맥주는 맥주 순수령을 따른 맥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시행령으로 밀의 소비를 억제하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러기에는 밀맥주가 너무 맛있었다. 독일의 상류층들은 음지에서 밀맥주를 향유했다. 비텔스바흐 공작은 데켄베르크 가문에게 밀맥주를 독점적으로 양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 권한은 다시 비텔스바흐 왕가에게 귀속되었다. 그렇게 밀맥주의 역사는 끊기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편법과 위법을 통해 맛의 전통이 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라거의 유행과 함께 밀맥주의 인기가 시들해졌을 때인 1855년, 게오르그 슈나이더(Georg Schneider)가 비텔스바흐 왕가의 밀맥주 독점권을 양도받으면서 밀맥주의 부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이어진 밀맥주 전문 양조장 슈나이더, 그리고 또 다른 밀맥주 명가인 바이엔슈테판(Weihenstephan), 파울라너(Paulaner), 아잉거(Ayinger), 에딩거(Erdinger), 프란치스카너(Franziskaner), 호프브로이(Hofbräu) 등 다양한 독일 브루어리들의 밀맥주들이 전 세계 애주가들을 찾아가고 있다.
독일식 밀맥주는 다양한 해외 맥주의 스타일 중에서도 우리에게 유독 가깝고 접근성이 좋다. 특히 한 스타일의 범주 내에서도 수준급으로 손꼽히는 맥주를 편의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밀맥주를 마시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수백 년의 역사를 마시는 일이기도 하다. 이 족적을 짚어 보면서 마신다면, 더 즐거운 음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독일에 여행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법과 명령조차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맛을 한국 국가대표 김민재 선수가 활약중인 분데스리가의 FC 바이에른 뮌헨 팀의 축구 경기와 함께 즐겨 보는 것도 맥주의 맛을 더욱더 강렬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