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내분비학회 지난 호 웹진 보기

Webzine No.40 | 제17권2호 <통권64호>

2024년 여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

문화가 산책

모아보기

맥주 이야기 시즌2
종교개혁은 버터와 맥주 덕분이다

윤석기

윤석기 천안엔도내과의원

중세의 암흑기에는 무고한 방관자로 지내기가 어려운 시대였고 그런 상황을 더 이상 견디지 모사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수도원은 도시에서 멀고 조용하고 규모가 작은 마을에 있었기에 좀 더 안전했다. 영국 작가 엘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유명한 추리소설 『캐드펠(Cadfael)』 시리즈의 배경은 중세 수도원이다. 전 재산을 수도원에 맡기고 여생을 보장받은 노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에서 수도원은 노부부와 남자 하인, 여자 하인들에게 음식과 맥주를 매일 지급한다는 계약서를 쓴다. 이것만 보더라도 중세에는 맥주가 식사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던 수도원의 생활을 고려하면, 맥주를 만드는 전문부서가 수도원 내에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결국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맥주는 수도원의 주요한 재원 중 하나가 되었고, 맥주 발효기술 중의 하나인 하면발효 기술이 15세기 바이에른의 베네딕트파 수도원에서 개발되는 등 수도원 양조장은 융성하게 되었다. 지금도 ‘구로 스타비야(수도원의 맥주)’의 이름이나 ‘오거스티나’, ‘파우라나’ 등으로 불리던 당시의 성자 이름이 맥주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청빈과 순결은 수도사에게 요구됐던 덕목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노동과 기도가 요구되었다. 군대같이 위계질서가 강하면서도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되는 수도원 생활에서 맥주는 수도사들에게 구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진가는 사순절 동안 나타났다. 예수의 박해를 생각하며 40일 동안 금식해야 하는 수도사들은 하루 한 끼 작은 빵 하나로 버텨야만 했다. 교회당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지만 성심은 배어나지 않고 배에선 계속 꼬르륵하는 비명만 들렸다. 주린 배가 계속 영혼을 시험에 들게 했던 것이다. 이때 구세주는 맥주였다. 다행히 수도원은 사순절 기간에도 맥주를 마시는 것을 허용했고, 수도사들이 매일 일정량의 맥주를 배급받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영양가가 높은 맥주를 배불리 마신 뒤, 기도하다 잠든 수도사에 대해 수도원장도 눈을 감아주었다. 맥주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니 기도할 때 시간이 잘 갔다. 이들에게 맥주는 축복받은 '마시는 빵'이었고, 은총의 음료였다. 이런 이유로 맥주를 만드는 수도사는 콧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술은 수도원을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쉽지 않은 종교적 금기를 강요받았던 수도사들이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고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마셨던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버터를 먹을 수 없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사순절,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날인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 육식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고행을 했던 예수의 고난을 기리는 의미였고, 이 육식에는 버터, 크림 등 동물성 지방도 포함되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와 유제품이 성욕을 부추긴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믿음으로 인해 독신 서약을 지키는 수행자들은 금식 기간에 동물성 식품을 멀리해야만 했고, 15세기부터는 이 같은 의무가 수도자뿐 아니라 일반 신자에도 확대되었다. 애초에 버터 대신 올리브유를 사용하는 지중해 국가는 이 금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탈리아, 스페인은 유제품 이외의 식재료가 풍부하고 바다에 인접한 관계로 육류보다 생선을 즐겼다. 문제는 유럽의 내륙 지방이었다. 북유럽 지역에서는 추운 날씨 탓에 올리브가 잘 자라지 않았고 또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버터가 아니면 당장 식생활에 쓸 기름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더해 낙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던 게르만 문화의 영향으로 북유럽 지역에서는 교황청의 포고를 선뜻 따르려 하지 않았다. 딱 40일간 이 금기가 적용되면 버틸 만했겠지만 사순절 금식 기간뿐 아니라 금육일인 매주 금요일과 각종 축일을 포함하면 육류 금식 기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여기에 교황청은 한 술 더 떠 이를 어기고 사순절에 버터를 먹게 되면 우상숭배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황당하게도 여기에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만약 부득이하게 먹어야만 한다면 교황청에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 면죄부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북부 게르만 민족 출신의 왕과 귀족들은 도저히 버터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교황에게 돈을 바치는 대신 버터와 우유를 택했다.

교황청이 말도 안 되는 ‘버터 면죄부’를 제시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이슬람교와 대대적인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을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동유럽을 빠르게 점령해나갔다. 심지어 1480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오틀란토에도 오스만 군대가 침입했다. 위기의식이 고조된 교황청은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면죄부를 발행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면죄부가 유가증권처럼 시중에서 유통될 정도에 이르렀다. 면죄부 판매는 십자군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1세기 처음 허용된 이후, 점점 기괴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모든 죄를 사면해 주는 일괄 면죄부, 특정한 기간을 정해 몇 개의 죄를 대속해 주는 부분 면죄부, 연옥에 있는 죽은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족 면죄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미리 앞당겨 사면받는 특별 면죄부 등 내용에 따라 가격도 다양했다. 심지어 예수가 입었던 옷이나 못 박힌 십자가의 나뭇조각, 성인의 손가락 같은 유물과 유골을 바칠 경우, 무려 30대에 걸쳐 1,000년 동안 대대손손 면죄를 받는 성유물 면죄부도 있었다. 이런 사실에 분노한 루터는 1517년, 자신이 몸담은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궁정교회(Schlosskirche) 정문에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당시 교회와 교황에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루터는 세상을 향해 큰 망치를 쥐고 95개조를 '꽝! 꽝! 꽝!'하고 못 박은 것이었다. 교회는 루터를 애송이 수사로 생각했지만 루터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온몸을 바쳤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인류 역사상 많은 성인이 있지만, 부지런하기로 따지만 루터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루터는 가는 곳마다 강연과 집회를 열어 시민에게도 가톨릭의 부패상을 알렸고, 비텐베르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번지기 시작한 루터의 주장이 불과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누구보다 일찍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에, 그는 종교 갈등으로 독일이 더 분열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황제는 루터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이제 루터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로마로 압송돼 화형을 당할 운명을 맞이할 것으로 보였는데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루터는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양심에 따라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라며 95개조의 철회를 거부하고, 그러자 오히려 전국에서 모인 제후들이 루터의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고 감동해 루터의 지지자로 돌아서게 된다.

연약했던 루터가 이처럼 담대한 모습을 보인 이면에는 맥주가 숨어있었다. 루터는 진술에 앞서 비서로부터 1리터짜리 독한 맥주를 넘겨받아 단숨에 비운 뒤,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두고 세계적인 맥주 전문가 마이클 잭슨은 저서 『The New World Guide to Beer』에서 “루터는 아인베크(Einbock) 맥주의 힘을 빌려 보름스 제국회의장을 거쳐 세계로 나아갔다”고 기술했다. 가끔 용기가 필요했던 루터의 곁에는 늘 아인베크 맥주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처럼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루터가 두려움에 지칠 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맥주였다. 부인 카타리나가 만든 맥주를 루터는 매일 2리터씩 마셨다고 한다. 결혼 지참금으로 맥주를 요구했고, 벼랑 끝 위기에서 맥주의 힘을 빌려 목숨을 구했던 루터는 누구보다 맥주를 사랑했던 마니아였던 것이다.

루터와 카타리나 ‹출처: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