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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편견> 함종렬 시인 등단

함종렬 (경상국립대학교병원 내분비내과)

함종렬 교수는 2021년 현대 시 계간지 ≪시와 편견≫에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후’, ‘ABU bag’, 그리고 ‘봄, 제4악장’ 등 3편의 시로 등단하였다. 경상국립대 국어국문학과 강희근 명예교수(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는 그의 등단을 추천하면서 “한 치 어긋남이 없는 임상의학의 교육과 진료 현장을 옆에 두고 있음에도 그의 시는 서정적 언어들로 시적 골격을 단단히 하고 있다. 야성이 아니라 시적 품성으로 사물을 지향한다. 인체가 순환의 원리로 유기적인 것처럼 자연에서의 조화를 노래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함종렬 교수는 경상국립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의과대학 부학장, 학장을 역임했다.

시인이 되는 과정에 어떤 계기가 있으셨을까요?
제가 이렇게 시를 쓰고 또 시인이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글쓰기를 자주 할 기회도 없었으며 즐겨하지도 않았었지요. 직업적 상황도 시를 접하고 쓰기에는 문턱이 높은 편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2019년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시를 쓰고 싶었지요. 그때 쓴 시가 ‘설날’이라는 제목의 시였습니다. 처음으로 써 본 시, 다시 돌아봐도 특별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학장이라는 임무를 막 내려놓은 시점이었고 아마도 그 허전함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짧지 않은 학교 행정업무의 나날들, 그 낯선 시간의 두께를 벗어나 다시 마주한 이전의 일상은 또 서먹하였지요. 그즈음 꽃보다 잎이 더 예쁘고, 비가 오면 나뭇가지 안으로 물이 더 세차게 흐르며, 겨울 빈 가지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고 느꼈습니다. 이걸 표현할 수 있는 시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시가 먼저 무심코 흘려보냈던 자연과 사람의 일을 데리고 와서 저를 이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행운이지요.
시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노래하는 문학 장르라는 걸 어슴푸레 깨닫게 되면서 묻어두고 있었던 기억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반복의 결과이지요. 배워야 할 것도 많은데 나는 무엇 때문에 흘려보내도 될만한, 혹은 아프기만 한 기억을 해마의 좁은 한편에 차곡차곡 다져 쌓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료실의 틈바구니와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서는 몰랐던 사실, 누구나 아프고, 그 아픔을 견뎌낸 만큼의 내가 된다는 것!, 견뎌내어야 하는 환자의 아픔이 있듯이 시를 쓸 때 비로소 시인이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억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때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시어로 풀어내면서, 시는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것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딱딱한 논리로 점철된 논문 위주의 글로 훈련된 의학도이신데요. 소설, 수필도 아닌 함축적인 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실지요?
사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세상살이의 경험에 대해서도 짧은 분량의 산문도 같이 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Ambu bag’이라는 시가 있는데 같은 제목의 수필도 썼었지요. 90년대 초반은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문화적 배경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수련의였는데, 장거리 자택으로 환자의 호흡을 ambu bag 하나에 의존한 채 모시고 가면서 느꼈던 과정을 묘사하였습니다. 그 작품으로 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필 공모전에 출품하여 수상하기도 했지요.
이후로도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시도 쓰지만, 글의 씨앗이 될 만한 것들도 메모하고 또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을 글로 옮겨 적고 있습니다. 생각이 짧고 필력이 모자라 한꺼번에 길게 나가지 못하고 A4 절반 분량 내외의 주로 호흡이 짧은 글들입니다. 소설은 꿈도 꾸지 않았고요. 이런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간결함과 함축성으로 충분히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시의 특성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시의 이러한 속성을 잘 보여주는 예가 ‘소크라테스와 사과’의 일화입니다. 어느 시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이지요. “인생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대답 대신 사과밭의 수많은 사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개만 고르라고 합니다. 사과밭을 지나온 뒤 선택하지 않았던 사과들을 떠올리고 또 남의 사과와 비교하면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제자들에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요. 시는 사물이나 관념의 본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결국 본질을 노래합니다. 시의 본질은 메타포(metaphor, 은유)에 있습니다.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몫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독자들 자기만의 경험과 어우러져 새로운 시가 되고 사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사과와 인생’의 교훈에서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남들과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경험과 시선만큼 자기만의 높이와 크기를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 한 편은 우리 일상에 영감을 던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절대 하찮은 것이 아닌 이유는 시가 삶의 언어이고,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시선과 높이에서 통찰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시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생산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게 합니다.
시 쓰기의 또 다른 장점은 훈련이나 수련이 없어도, 그리고 특별한 준비나 도구를 갖추지 않아도 순간의 생각, 찰칵 사진을 찍는 정도의 짧은 시간의 스마트폰 메모만으로도 시의 씨앗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제가 시 창작 활동을 선택하였고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주신 작가나 문학작품이 있을지요
제가 근무하는 대학 앞에는 찻집이 하나 있습니다. 점심 후 동료들과 함께 으레 찾는 곳이지요. 제가 시를 열 편 정도 썼을 때였을 겁니다. 마침 대학 시절 교양과목으로 국어를 가르쳤던 교수님께서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약 40년 만에 뵙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와 함께 요즘 시가 자꾸 떠올라 쓰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시는 누구에게나 때를 가리지 않고 오는 것이지만, 일단 시가 온다는 것은 행운에 속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격려하시면서 감사하게도 다음에 습작 시를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바로 강희근 명예교수님인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이 분야의 대가이십니다. 그 인연을 계기로 제가 시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또 한 분의 스승은 지역대학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으로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하는 박종현 선생님입니다. 그분 역시 이 지역 출신의 뛰어난 시인이면서 바쁜 일상에 조금씩 시들해지기 쉬운 저의 시 창작 활동에 흥미와 열정을 부어 넣어주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시에 대한 저의 시선의 많은 부분은 그분의 가르침 덕분이며, 지금도 시적 탐구와 창의적 접근에 아낌없는 격려와 피드백을 해주고 계십니다.
저에게 영감을 준 시는 매우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의학에 대한 시도 쓰지만, 주로 자연과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시를 즐겨 쓰는 편인데 이러한 소재의 시들을 자주 접하면서 배움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시를 쓰고 작품으로 남기는 것이 교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제가 시를 쓰게 된 시점에서 답을 찾아볼까 합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시를 쓰고 나면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비록 짧은 이야기이지만 문장을 다듬고 구성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즐거운 창작 활동이며, 다 쓰고 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성취감 등은 다른 일상 활동에서는 쉽게 누릴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를 쓰고 난 뒤 대부분은 주변 친구나 가족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저 스스로 대견해하고 기쁨을 느낍니다. 이는 아마도 글쓰기가 자기표현의 수단이라든가 그 욕구를 충족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충족을 넘어선 이 만족감이 시 창작 활동의 동기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뚜렷한 계기 없이 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욕구보다는 더 잔잔하고 촘촘한 것, 그래서 일상에서 부족하다고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는 것에서 오는 저릿한 자기만족이 제가 시를 쓰는 의미의 하나가 아닐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작품 중에서 특별히 들려주고 싶은 한 편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지요
글쎄요. 아까 시를 읽고 느끼는 영역은 독자들의 몫이라 했는데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저의 시집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후』에 실려 있는 ‘등 뒤의 바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바람이 등 뒤에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바람이 얼마나 쉼 없이 설레고 있었는지/바람을 등지고 있을 때는 모른다//바람이 등 뒤에 있을 때는 듣지 못한다/바람이 얼마나 흐느끼고 있었는지/바람을 등지고 있을 때는 들리지 않는다//누가 바람이 업힌다 하는가/누가 바람을 업어준다 하는가/바람은 안는 것이다//바람이 얼마나 갈갈이 찢어져/등 밀어주고 비우듯 지나고 있었는지는/돌아서서 안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바람은 등 뒤에서 묵묵히 나를 사랑하고 후원하는 누군가의 염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항상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말없이 지켜보고 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부딪히는 부조리하고 무거운 등 뒤의 짐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요. 역시 독자의 생각에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상과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시가 줄 수 있는 영향력이 있다면 무엇일지요?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한순간에 영원을 담아라.>
1803년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라는 시의 첫 행입니다. 200년이 흐른 뒤 ‘스티브 잡스’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우주를 꿈꾸는 그의 발상과 창의력으로 결국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었다고 하지요.

하나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기죽지 말고 살아 봐/꽃 피워봐/참 좋아.>
나태주 시인의 ‘풀꽃3’ 전문입니다.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이 짧은 시를 읽고 마음을 다잡아 다시 열심히 살아갈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더 빨리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불확실성과 조급증은 더 커지고 있지요. 하루 몇 시간을 온라인 소통의 공간에 있는데 진정한 사회적 교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지 않나요? 멍때리기가 유행하는 것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이 알고자 하고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놓치는 것도 많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멍때리기가 아니라 우리를 서두르지 않고도 자유로워지는 명상의 세계로 이끌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분명히 하려는 첨단 이론의 시대, 언어 이전의 것, 감성을 노래하는 시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2년 <<시와 편견>> 시인 등단 당시                   ’21년 서울지하철 시 공모 당선작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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