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19년 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2년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캐임브릿지에 위치한 Broad Institute of MIT & Harvard와 보스턴에 위치한 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 장기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주로 당뇨병 및 만성질환 유전체 연구를 하였으며 다양한 분야 (컴퓨터 공학, 유전학, 통계학, 의학, 생물학 등)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연구들을 보다 깊이 있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Jose C. Florez, James B. Meigs, Jason Flannick 교수님들이 저의 멘토 역할을 해 주었으며 제가 진행하고자 하는 연구들을 다방면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제가 수행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학회 혹은 학술지를 통해서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연수 대상 주기관이었던 Broad Institute에 대한 소개와 그 곳에서의 제 경험은 당뇨병학회 소식지 해외 연수기에 기술한 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2년 동안 생활했던 렉싱턴(Lexington)이라는 곳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연수를 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연구소까지의 교통편 및 아이들 교육 환경을 고려하여 렉싱턴이라는 곳을 2년간 살곳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렉싱턴은 보스턴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인구는 34,000명 정도입니다. 보스턴 도심에서 30-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며 10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레드라인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곳은 미국 독립 운동의 첫번째 전투가 일어난 곳, 보다 정확히 말해 첫번째 총성이 울린 곳으로 유명합니다.

  1775년 렉싱턴 옆에 위치한 콩코드라는 마을에 미국 민병대들이 무기를 숨겨 두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영국군은 이를 파괴하기 위해 4월 19일 새벽 약 700명의 병사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민병대 역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렉싱턴에 집결하여 처음으로 영국군과 민병대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총을 겨누고 서로 한참을 응시하던 중 첫번째 총성이 울리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 중 누가 먼저 발포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첫번째 교전으로 민병대 8명이 사망하였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습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진격하여 그 곳에 숨겨진 대포와 탄약들을 불질렀는데 그 화염을 보고 흥분하여 모여든 주변 민병대들과 여러 차례 교전을 하였습니다. 특히 콩코드 노스브릿지 (North Bridge)에서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국군이 퇴각하는 길 곳곳에 숨은 미국 민병대 미닛맨(Minute Man)들은 반복적인 기습공격을 통해 영국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지금도 렉싱턴 마을 중심부에는 영국군에 맞서 싸운 민병대 대원의 동상이 우뚝 서 있으며 첫번째 총성이 울렸던 그 들판도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콩코드 지역에서 전투가 있었던 노스브릿지를 포함하여 미닛맨들이 영국군을 기습 공격했던 곳들은 Minute Man National Historical Park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공원은 렉싱턴과 콩코드에 걸쳐 있어서 산책을 하거나 피크닉을 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저희 가족도 주말이면 이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Figure 1). 특히 코로나19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 이 공원을 더욱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렉싱턴 주민들은 이 곳에서 미국 독립 운동의 첫번째 전투가 일어났다는 점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매년 관련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Figure 1. 콩코드 Minute Man National Historical Park 노스 브릿지에 있는 민병대 동상 앞에서 둘째, 셋째 아이와 함께. 민병대 동상은 왼속에 쟁기를 들고 오른속으로 머스캣을 들고 있다. 동상은 다니엘 체스터 후렌치 (Daniel Chester French)의 작품으로 그 유명한 워싱턴 DC 링컨 메모리얼의 링컨 동상 조각가이기도 하다. 후렌치 역시 콩코드 지역 출신으로 에머슨, 알콧과 친구이며 이웃이었다.

  렉싱턴에 거주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점은 이곳이 비단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곳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신적, 철학적 독립도 시작된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776년 독립 선언이 선포된 이후에도 미국의 철학, 문학 등 문화의 많은 면이 유럽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1850년대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do Emerson) 등은 유럽의 철학 사조와는 사뭇 다르고 다분히 미국적인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를 주창하였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 자연속에서 개인적인 내적 ‘초월’ 상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성찰과 직관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소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콩코드 지역에 위치한 Walden이라는 커다란 연못 옆 숲 속에 작은 움막을 짓고 2년 넘게 혼자 살았습니다. 자연 속의 삶을 통해서 느끼고 성찰한 내용을 정리하여 ‘Walden’이라는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Walden 연못은 둘레가 약 2.7km 정도인데 조용하며 산책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여름에는 연못을 가로질러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로가 살던 움막은 현재 터만 남아 있고 그 앞에 다음과 같은 ‘Walden’의 유명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Figure 2).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 Henry David Thoreau

Figure 2. 소로의 Walden 연못 옆 숲속의 움막 터 앞에서 첫째 아이와 함께. 목판에 소로의 책 ‘Walden’의 유명 문구가 새겨져 있다.

  소로와 함께 초월주의를 이끌어 갔던 사람으로 ‘Nature’이라는 에세이로 유명한 에머슨이 있고, 그 외에도 아모스 브론손 알콧(Amos Bronson Alcott)도 있습니다. 알콧은 본인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교육 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학교에서 체벌을 없앤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분의 딸이 바로 ‘작은아씨들’의 저자인 루이자 메이 알콧(Louisa May Alcott)입니다. 2019년 영화로도 제작된 자전적 소설 ‘작은아씨들’의 배경이 바로 콩코드 지역이며 엠마 왓슨이 네 자매 중 메그(Meg) 역할을 맡은 이 영화는 실제로 콩코드 지역에서 촬영되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집은 아직도 ‘알콧 하우스(Louisa May Alcott’s Orchard House)’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외 초월주의 사상가들과 친분을 유지한 사람 중에 ‘주홍글씨’ 및 ‘큰바위 얼굴’로 유명한 나타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에는 단편 소설 ‘큰바위 얼굴’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에 인접한 뉴햄프셔 Franconia에 실제 얼굴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이것이 소설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2003년경에 무너져 내려서 지금은 볼 수가 없습니다. 소로, 에머슨, 알콧, 호손은 모두 동시대를 살며 작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죽은 후에도 모두 Sleepy Hollow Cemetery에 위치한Author’s Ridge라는 언덕에 서로 가까이 묻혀 있습니다 (Figure 3).

Figure 3. Sleepy Hollow Cemetery Author’s Ridge에 묻혀 있는 초월주의 작가들의 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Henry David Thoreau, Ralph Waldo Emerson, Louisa May Alcott, Nathaniel Hawthorne의 묘). 묘비 앞에 시민들이 놓고 간 펜들이 인상적이다.

  소로와 에머슨은 인간은 자연의 위대함 속에서 직관을 통해 인간의 내재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역설하며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철학은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동경, 때로는 전체 혹은 사회 규범보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수 기간 중 두번째 해에는 코로나19 유행으로 멀리 여행을 가거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대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제가 살던 렉싱턴과 그 주변 콩코드 지역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렉싱턴은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미국의 정신, 사상, 철학적 독립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렉싱턴은 언젠가 꼭 다시 한번은 돌아가 보고 싶은 제2의 고향으로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웅장하고 화려한 곳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주변 지역도 잘 살펴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바쁜 병원 생활로 인해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연수를 통해 잠시나마 재충전을 하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연수를 허락해 주신 서울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선생님들과 제가 없는 동안 제 빈자리를 채워 주셨던 선생님들(특히 양예슬 선생님, 강선영 선생님, 권슬기 선생님)께 지면을 통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